그런 점에서 물질 유혹에 아주 무방비하게 노출된 세대 같기도 하고요. 저걸 사면 내가 달라질 거 같은 희망을 하지요. 다른 희망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20살의 TTL 이런 말, 되게 모호하다는 지적 많았어요, 그런데 10년이 지나니까 ‘돈 쓰라는 소리였구나.’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고요.

세대내 경쟁이 너무 치열해요. 애들이 뭐가 안 되면 자잘한 거는 보는데 큰 거는 못 봐요. ‘영어 성적이 부족해서 입사에 떨어졌어.’라고 생각하지 시스템 문제라고 생각을 절대 못 하니까 되게 안타까워요. 다 내 탓이야, 라고만 생각하죠.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럼 뭐가 남는데 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해요.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2429751

"능력 위주의 사회"라는 것이 귀족 사회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관점 중 하나는, 사회 전체의 퍼포먼스를 높여서 그 잉여로 인해 가장 가난한 사람의 삶이 더 나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능력 위주의 사회의 정당성은 그 능력 있는 사람들의 부가 능력 없는 사람들에게로 흘러들어가 삶을 낫게 만들어줄 때만 확보되는 것이다.
http://www.bawi.org/x/read.cgi?bid=906&aid=1288723&p=174

중국과 러시아는 몇 안되는 소규모 파벌들이 지배하는 권위주의 체제를 자랑한다. 이 시스템에서는 정치권력 승계 과정이 투명하지 않은, 거의 마법적이라 할 만한, 신비스런 의식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중국에서의 권력승계는 노골적으로 비민주적이고 비밀주의적이지만, 한편으로 확고하며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진다. 모스크바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모스크바에 제대로 작동하는 권력승계 매카니즘이 없다는 것, 이것은 국제질서 유지에 실질적 위협이 되고 있다.

(서구의 나라들과는 달리) 고대로부터 하나의 민족국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러시아. 자존심 센 제국이며 특이한 권위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이 나라가 하루 아침에 영미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오만일 따름이다.(러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영미식의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정착되리라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러시아 국민과 지도자들 사이에 맺어진 묵계는, 지도자가 안전과 번영 그리고 위신을 국민에게 준다면 국민은 지도자에게 권력을 떠안기고 민주적 자유도 양보한다는 것이다.

푸틴은 자신이 이룬 업적이 서구에서도 존경받기를 바라는 까닭에 헌법을 무시하고 계속 대통령 직을 고수하려 하지는 않았다. 푸틴과 그의 중신들이 믿는 것은 러시아의 위신을 되살려 준, 해괴한 ‘권위적 민주주의’이다.
http://bahamund.wordpress.com/2009/01/13/in-russia-power-has-no-heirs/2/
요즈음 들어서는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나 "다수가 지배하는 사회"가 최선도 아니고 어쩌면 차악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저 둘이 각각 "자본주의", "민주주의"와 치환될 수 있을까? 필요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나 스스로도 종종 저것들이 가끔씩 사상의 유일한 기반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한다. 현 한국은 철학의 부재나 문화적 차이에 왜곡된 상일까, 아니면 단순히 사상의 어두운 이면일 뿐일까.

체제에 순응하는 보상이 목숨 연명이 아닌가 싶게 상벌이 가혹해지는 것 아닌가 싶다. 사실, 인류가 버틸 수 없을 만큼 팽창해 버려 그에 대한 반동으로 현 삶이 각박해지는 것이라면, 이러한 상벌도 수긍할 수 밖에 없겠지마는, 이것이 현 체제의 특성 덕분에 그러한 것이 아니냐고, 줄기차게 자문하고 있다.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지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에 부정적인 대답을 조금이나마 자신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 내 주변에.

진보/보수 이분법이 참으로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종종 하지만, 의식적으로라도 사람을 좌우로 갈라놓는 일을 멈추기는 쉽지 않다. 음, 미약한 나의 구분법으로는, 아직은 진보 정도와 휴머니스트 정도의 상관관계가 최소한 positive는 아닌 것 같다.

최순덕 성령 충만기 http://story.media.daum.net/SoonDuk/ : 읽고 불쾌해 하시는 기독교인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글이 단순히 한국 기독교인들을 비판하기 위해 쓰인 글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한국 기독교라는 돋보기를 통해 투영한 글뿐이라고 생각하고, 물론 게다가 글이 신선하고 재미있기에 여기 올려놓는다. 아밀리 노통식의 해괴함.
비판에 과민한 정권은 '가상의 열광'을 '현실의 위협'으로 간주했다. 사이버 공간의 '인터넷 대통령'과 현실공간의 '이명박 대통령'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존재질서에 속하나, 대통령은 둘일 수 없다는 걸까? 현실의 권력은 가상의 대통령을 자신의 도전자로 여겼다. 은유를 현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사이버 공간의 글을 대하는 적절한 태도는 '판단중지'(epoche)다. 익명으로 올리는 글은 당연히 실명으로 올리는 글보다 책임감이 떨어진다. 하지만 거기서 '그러므로 익명으로 올린 글이 더 위험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네티즌들은 실명으로 올린 글과 익명으로 올린 글에 동일한 크레딧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익명으로 올린 글은 실명으로 올린 글보다 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검찰에서는 미네르바의 글에 대해 "인터넷에서 모은 정보를 짜깁기한 것"이라 평가했다. 동아일보는 검찰의 말을 빌려 미네르바가 "인터넷 정보 재가공에 탁월"(동아일보 2009.01.12)하다고 보도했다. 물론 이를 그들은 부정적으로 의미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한 그것이 바로 인터넷 글쓰기의 본령이다. 미디어 이론에서는 전자매체 글쓰기의 특성을 '반제품'으로 규정한다. 즉 활자매체의 글쓰기가 독자들에게 완제품으로 제공되어 일방적으로 수용되는 반면, 전자매체의 글쓰기는 언제라도 복제, 인용, 편집, 가공이 가능한 반제품의 상태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네티즌들은 정보를 완성품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사운드든, 이미지든, 텍스트든, 그들은 정보를 반제품의 상태로 다운로드 받은 후, 인용, 수정, 가공, 편집을 통해 그것을 새로운 정보로 조직하여 다시 업로드한다. 사운드의 짜깁기는 리믹스, 이미지의 짜깁기는 합성, 텍스트의 짜깁기는 몽타주라 부른다. 전자적 글쓰기의 격률은 이것이다. "새로움은 요소가 아니라 배치에 있다." 전자시대에 지식은 머리에 내장되는 게 아니라, 하드와 서버에 외장된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는 검색술, 정보의 바다를 서핑하는 항해술이다.
http://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112153717§ion=02
정치에서, 언론을 거쳐, 인터넷으로. 한국의 정치권력과 언론권력 둘 다 자신들의 정보력이 인터넷보다 뒤쳐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워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본다. 아고라의 조회수가 몇천에 불과하며, 아고라 시스템을 악용한 극우파/극좌파들의 글들이 추천 50개씩 받고 대문에 뜨고, 또한 여론의 대세가 최소한 전의 정치/언론 여론 대세만큼이나 이미지에 좌우된다는 것 등 인터넷 역시 많은 흠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인정하도록 하지만, 이를 통해 위키피디아식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쉽게 버릴 수 없다.
2009/01/27 10:45 2009/01/27 10:45
Date
2009/01/27 10:45
Category
contemp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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